[취재수첩] “살아 남는 자가 강한 자”. 2009년 02월 11일 18:35:19 / 백지영 기자 jyp @ddaily.co.kr. #1.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한 노동부 서울서부지청 고용지원 ...
의자에 앉은 한 남자가 멀뚱히 고개를 숙인 채 땅만 쳐다보고 있다. A씨는 올해 1968년생으로 만 41세. 3살 연하의 아내와 올해 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한 아들을 둔 어엿한 가장이다.
불과 3주 전만 해도 그는 잘나가는 외국계 IT업체 과장이었다. 지난 1997년 여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시작되고 지난해 10월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 선언 뉴스를 접할때 까지만 해도 그 여파가 결국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외국계 기업의 한국지사에 까지 미치게 될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이메일 한 통으로 10년 넘게 근무하던 직장과는 결별했다. 실직급여를 받기 위해 고용지원센터를 찾았지만 낯설기만하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하필 이런 시기에...”
그도 해고 통보를 받기 전엔, 구조 조정은 그저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다. 개인사업을 하기엔 너무 위험하고, 업무 스트레스가 심했던 기억때문에 IT분야로 재취업하기는 싫지만 마땅한 업종이 없다. 그에겐 올 겨울이 정말 길다.
#2. -한국엔 언제 오셨습니까?
“이제 1년 다 되어갑니다”
-애는 몇 살이죠?
“7살인데, 서울 와서 영어유치원 다니다가 최근 일반 유치원으로 옮겼는데 적응을 못하네요”
-요즘은 회사 분위기도 안 좋고 해서 커피숍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괜찮으시죠?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벌어지는 면접 풍경이다. 한 남자가 열심히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열심히 대답을 하고 있는 맞은편 남자는 4년 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괜찮은 대학에서 MBA를 따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정작 요즘 같은 시기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다.
작년 말부터 벌써 많은 수의 IT기업들이 미국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제 빙하기’에 조직개편과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몇개월 사이 ‘인력 풀(pool)'이 좋아졌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직원을 정리할 명분을 찾지 못했는데 경제위기 분위기를 한껏 이용해 조직을 경영자의 의도에 맞게 확 줄여버렸다는 것이다. 경제가 좋은 나쁘든 그 타격은 항상 약자에게 가장 먼저 미친다.
다른 업체에 비해 비교적 실적이 좋았던 IBM조차 현재까지 5000여명이 넘는 직원을 내보냈다. 최근에는 실직 대신 외국에서 근무할 수 있는 옵션을 제시했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해외근무 수당도 없고 현지에서 고용한 현지인과 동일한 연봉을 받는다니 우리 정서로는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아이러니하게도 샘 팔미사노 IBM 회장이 최근 오바마 미국 대통령측에 정부 차원의 IT투자가 고용 창출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을 했다는 점이다.
팔미사노 회장은 작년 말 오바마 정권 인수팀에 브로드밴드, 헬스케어IT, 스마트 그리드 기술 등에 정부가 300억 달러를 투자할 경우 미국에서 90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 인물.
고용창출을 얘기하면서 정작 IBM은 계속해서 구조조정의 피치를 올리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지독한 모순이다. 문제는 이러한 모순이 우리나라 IT기업들에게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기업들이 잡 셰어링, 즉 '일자리 나누기'를 기업들에게 부탁하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 콧방귀도 안뀐다. 오히려 구조조정의 명분이 너무나 많아진 것에 흡족해하고 있다.
어찌됐든 이제 우리나라도 어느날 출근해보니 갑자기 회사 출입 카드키가 작동이 안 된다던지, 미리 출입구에 나와 있던 인사부 직원이“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라며 직접 해고 사실을 통보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물론 일정 규모 이상 업체의 경우, 퇴사 전후로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가 도움이 되고 있지만 아직 그렇게 일반화되지 않았다.
결국 개개인이 해야 할 일이라곤 오로지 꾸준한 ‘자기개발’ 뿐이다. 최대한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배양해 업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스스로의 가치를 키우는 것.
다소 진부한 얘기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는 스스로를 ‘피도 눈물도 없는’ 독한 놈으로 만들어야 살아남는 세상이 돼 버렸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요즘은 너무 서글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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