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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들의 쪽지'. 지난 25년간 청소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아픔을 함께 나눴던, 16절지 반쪽 크기의 16쪽짜리 소책자. 1984년 9월 세상에 처음 나온 이 쪽지는 그동안 매달 1차례씩 전국 1만4200여개 학교에 무료로 배달돼 청소년 수백만명의 손을 거쳐 갔다.
이 쪽지가 지난해 12월호 이후 중단됐다. 쪽지 발행인인 김형모씨가 52세에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입원, 급성췌장염 판정을 받은 지 이틀 만인 지난해 12월16일 숨을 거뒀다. 유언도 남기지 못했다.
그 뒤를 아내 강금주(49)씨가 잇기로 했다. 갑작스레 남편을 잃은 충격 속에서 그는 1·2·3월 합본 형태로 238번째 쪽지를 최근 펴냈다. 김씨의 죽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자신이 쪽지를 이어갈 것임을 밝혔다.
남편과의 만남도 쪽지에서 시작됐다. 전남 고흥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하던 강씨는 쪽지의 독자로 지내다 미혼모 여고생 상담 문제로 김씨와 만난 것이 인연이 돼 결혼했다. 8년 넘게 학생들의 상담 편지를 읽고 분류하고 답을 달고, 교정 일을 보며 남편과 함께 자비로 쪽지를 발행하는 일에 미쳐 살았다. 첫딸의 이름을 '쪽지'라고 지었을 정도다.
그러다 강씨는 95년 친정 집안의 문제로 충격을 받고 결국 딸과 아들 한빛을 데리고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크리스천 카운슬링을 공부하다 정말 하고 싶던 법학공부를 시작했고, 지난해 10월 호주 변호사가 됐다. 남편은 국내에서 쪽지를 발행하다 짬짬이 호주를 찾아 가족들과 만났다. 학비와 생활비는 한국인 유학생 10여명을 하숙으로 받으며 충당했다. 이를 계기로 1년에 2차례 방학기간 동안 호주 어학 연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쪽지 발행을 위한 유일한 수익 사업이다.
사실 주변에서는 모두 강씨를 말렸다. 그냥 외국에 나가서 아이들과 살지 왜 이 힘든 일을 떠안으려 하느냐는 것이다. 24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강씨는 "외국에서 변호사 일을 하면서 아이들과 살 수도 있지만, 그럼 남편과 우리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청소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쪽지 발행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자기 신앙이자 약속이라고 말하던 남편이었다. 강씨 역시 단 한 번도 쪽지 발행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요즘도 편지나 쪽지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고민을 토로하는 청소년들을 외면할 수도 없다.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아무 말 못하는 남편을 보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일을 해줄게"라고 약속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결심은 했지만, 현실은 결코 간단치 않다. 한 달 쪽지 발행 및 발송비는 2500만원이 넘지만, 한 달 후원금은 220만원에 불과하다. 남편이 쪽지 발행을 위해 진 빚도 적지 않다. 그는 "남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인생의 가장 큰 숙제 같다"면서 "그동안 쪽지를 사랑해준 많은 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뜻있는 분들과 함께 쪽지 발행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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