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8일 일요일

비리 경영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비리 경영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기자의 눈] '사상 최대 물갈이' 삼성 인사 유감. 존 그리샴의 최근작 <어필>은 우울한 소설이다.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갑자기 암 ...


"비리 경영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기자의 눈] '사상 최대 물갈이' 삼성 인사 유감

기사입력 2009-01-16 오후 6:35:27

 

 그리샴의 최근작 <어필>은 우울한 소설이다.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갑자기 암 환자가 급증한다. 상수원에 유독성 폐기물을 마구 버린 대기업 때문이다. 주민들은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이겼다. 해당 대기업 주가는 폭락했고, 기업 소유주와 경영진은 절망에 빠진다.

이게 결론이라면, 약자가 힘을 합쳐 불의한 강자를 꺾은 '해피 엔딩' 소설이었을 게다. 소설 <어필>은, 그렇지 않다. 1심에서 패소한 기업가의 절망, 그리고 승소한 주민들의 기대는 도입부일 뿐이다.

기업가는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상원 의원을 매수하고, 법정을 장악한다. 그리고 2심에서 판결을 뒤집는다. 1심 패소에 따라 폭락했던 주가는 기업가에게 전화위복이 됐다. 2심 승소를 미리 예상하고 있던 그는 헐값에 주식을 사들였다. 2심 판결이 나오자 주식은 폭등했고, 부도덕한 기업가는 더 큰 부자가 됐다.

삼성 가문 해결사 노릇한 사법부…"소설이 현실로"

이게 소설의 결론이다. 책을 덮고 고개를 들면, 비슷한 상황이 눈에 띈다.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을 한 게 지난 2007년 10월 말이었다. 주요 언론의 외면으로 잠시 주춤한 듯 했지만, 곧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조성, 사법부와 국세청 등 국가기관에 대한 전방위 금품 살포, 법정 증거 및 회계 자료 조작 등.

1960년대 사카린 밀수 사건, 1990년대 삼성 자동차 산업 진출 실패를 넘어서는 위기가 삼성그룹에 닥쳤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당연한 일이다. 그룹 내부 정보가 집중되는 자리에 있었던 이가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비리를 고발했다. 검찰 고위 관계자에게 돈 뭉치를 직접 전달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비리 의혹 연루자들이 처벌을 받으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지난해 4월 22일,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날 이후 그는 삼성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16일 발표된 삼성 사장단 인사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다고 보는 이들은 흔치 않다. ⓒ뉴시스
하지만, 현실은 소설만큼이나 묘하게 흘러갔다. 삼성의 조직적인 비리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 꾸려진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의혹의 핵심을 교묘하게 비켜가는 행보를 취했다. 비리 의혹을 제보한 김 변호사의 진술을 계속 무시했다. 또, 삼성 돈을 받았다고 실명이 지목된 검찰 관계자조차 조사하지 않았다.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등 핵심 의혹 대부분에 대해 수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수사를 진행한 경우에도 의혹을 덮기에 급급했다.

법원은 한술 더 떴다. 그나마 혐의가 인정된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등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줬다. 기존 법원 판례까지 뒤집어졌다.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은 이재용 씨에게 삼성 경영권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다. 이 사건에 대해 면죄부를 받으면서, 삼성 경영권 승계 문제에 걸림돌이 사라졌다. 게다가 법원은 삼성이 차명으로 관리해 왔던 자금 역시 이병철 선대 회장의 유산으로 공식 인정해줬다. 경영권 승계와 차명 자금 문제는 모두 삼성 이건희 전 회장 가문의 대표적인 골칫거리였다. 이런 문제에 대해 법원이 해결사 역할을 한 셈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촉발된 일련의 사태가 이건희 집안에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경영권 불법 세습 의혹에서 자유로워진 삼성 그룹이 16일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부회장급을 제외하고, 만 60세(1948년생) 이상의 경영진은 원칙적으로 퇴진시킨다는 원칙이 적용됐다. 그 결과, '이건희 세대'에 속하는 경영자들은 대거 물러나고 젊은 경영자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또 이재용 씨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최지성 사장이 삼성전자를 이끄는 '투톱' 가운데 한 명으로 기용됐다. 모두 '이재용 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를 위한 포석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관련 기사: 삼성, '이재용 체제' 본격 시동)

비리 의혹 임원 살리기, 내부 충성 유도용?

이날 인사 발령으로 가문의 숙제만 해결된 게 아니다. 삼성특검 수사 과정에서 광범위한 차명계좌 거래 사실이 확인돼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던 배호원 전 삼성증권 사장이 이번 인사에서 삼성정밀화학 사장으로 복귀했다. 차명계좌에 담긴 돈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삼성 임직원들에게 알리는 신호나 다름없다. 이런 신호를 접한 삼성 임직원들이 내부 비리에 대해 더 굳게 입을 다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불법 로비 의혹이 제기됐던 장충기 삼성물산 부사장은 삼성물산 사장 겸 삼성브랜드관리위원장으로 오히려 승진했다. 또, 삼성특검에 의해 피고로 기소됐던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 역시 삼성토탈로 옮기면서 사장직을 유지했다. 창사 이래 최대 규모라던 경영진 물갈이 속에서 삼성 비리 의혹 연루자들은 자리를 굳게 지킨 셈이다. 이건희, 이재용 부자를 위한 일을 하다 입은 상처는 영광으로 보상한다는 신호가 삼성 임직원들에게 전달된 셈이다. 이런 신호를 접한 삼성 임직원들이 머지않아 등극할 새로운 총수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소설 <어필>에서 암에 걸린 주민들 편에 섰던 변호사는 결국 파산했다. 대신, 부도덕한 기업가는 회사를 더 강력하게 장악하게 됐다. 한국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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