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30일 목요일

'투쟁'에 익숙해져... 끝까지 간다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 민세원 철도노조 서울 KTX열차 승무지부장.
ⓒ2006 오마이뉴스 안홍기
"'투쟁'이란 말이 익숙해져 버렸다.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익숙해진다. 화장실 줄도 국방색 침낭도 노동가요도. 하지만 마음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싸움이기에 우리가 이겨야 하는 상대는 우리에겐 너무 큰 권력이기에.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부산 KTX열차 승무지부에서 일하는 남소영(28)씨는 마이크를 잡고 담담히 말했다. 28일 오전 서울역 2층에서 열린 KTX 여승무원 정규직 쟁취를 위한 집회에서였다. 그의 말에 현장에 있던 200여 여승무원들의 얼굴이 순간 숙연해졌다. 일부는 씁쓸한 웃음을 보였고, 일부는 붉게 충혈된 눈을 훔쳤다.

"'투쟁!'이란 말이 익숙해졌다"

벌써 1개월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봄맞이를 준비하던 3월 초, KTX 여승무원들은 투쟁의 봄을 선언했다. 시간이 지나 봄꽃들이 거침없이 망울을 터뜨리는 지금. 처음엔 "투쟁!"이란 구호조차 어색했던 여승무원들의 목소리는 이제 거침이 없어졌다. "비정규직 철폐하고, 인간답게 살아보자!"

KTX 여승무원들은 오늘도 '투사'로 다듬어지고 있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에는 1개월 전보다 더 힘이 실려 있다. 구호를 외치며 치켜드는 오른손은 더 이상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다. "어색하고 별 관심도 없던" 민중가요는 이젠 이들의 18번 유행가가 됐다.

민세원 서울KTX 승무지부장은 "이철 철도공사 사장 본인이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민주 투사 출신이라서 그런가? 우린 지금 더욱 강인한 투사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씨는 300명 가까운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을 최선봉에서 이끌고 있는 인물. 그러나 지금 민씨의 모습을 '투쟁의 현장'에서는 볼 수 없다. 그는 지난 3월 16일자로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동료들이 집회를 하러 나갈 때도 그는 19일 째 점거 농성하고 있는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를 떠나지 못한다.

▲ 파업농성중인 KTX 여승무원들을 비롯한 철도노조원들이 9일 저녁 서울역 부근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에서 이철 사장 면담을 요구하며 기습농성에 돌입했다.
ⓒ2006 오마이뉴스 권우성
 
"우린 이철 사장이 만든 투사, 끝까지 간다"

민씨는 KTX 여승무원 중 가장 나이가 많다. 지난 98년부터 5년 동안 대한항공에서 스튜어디스로 일한 이력이 있다. 민씨는 "하늘에서 배운 서비스 기술을 땅에서 펼치려했는데, 비정규직 문제 때문에 잠시 보류됐다"며 "머지 않아 동료들과 함께 정규직 신분으로 KTX에 오를 것"이라며 웃었다.

스튜어디스에서 비정규직 KTX 여승무원으로, 그리고 이젠 '불법파업의 주범'으로 수배자가 된 민씨를 28일 오후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에서 만났다. 그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강한 확신을 보였다.

- 수배자 몸으로 싸우는 게 쉽지 않을텐데.
"지금까지 살면서 노동자의 삶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 아직 내가 수배자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동료들과 함께 투쟁의 현장에 서지 못하는 게 가장 힘들다. 투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크다. 지부장으로서, 그리고 맏언니로서 우리가 꼭 이길 것이라 격려하고 있다."

- 파업을 시작한 지 1개월 가까이 지났다.
"처음부터 쉽게 끝나지 않을 싸움이란 걸 알고 시작했다. 370명의 여승무원 중 80명 정도는 파업을 접었다. 일부는 현장에 복귀했고, 일부는 다른 길로 떠났다. 그들을 떠나보낼 때 매우 힘들다. 철도공사 쪽에서 우리를 와해시키기 위해서 계속 회유와 협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린 끝까지 간다."

- 지난 1개월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이철 사장은 싸움의 상대를 잘못 골랐다.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 강인한 투사가 돼 가고 있다. 노동자, 비정규직의 삶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KTX의 남자 승무원은 정규직이고, 여성 승무원들은 100% 비정규직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사람을 차별하고, 어떤 식으로 착취하는 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우리 여승무원 모두는 이제 사용자의 눈이 아닌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에서 19일 째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
ⓒ2006 오마이뉴스 문경미
 
- 지금까지 싸우면서 무엇이 가장 어려웠나.
"우리는 지금 19일째 이 곳 철도공사 서울지역본부에서 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의 업무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저 1층 로비와 복도에서 먹고 자고 할뿐이다. 차가운 로비에서 침낭을 덮고 자는 것도, 하루 세 끼 모두 차가운 도시락을 먹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샤워실도 없어 근처 목욕탕을 이용하고 있다. 나는 수배자 신분이라 그마저도 불가능해 물을 데워 화장실에서 씻는다.

그러나 가장 힘든 건 몇몇 철도공사 직원들의 인간적 모욕이다. 그들은 투쟁하는 우리를 보며 '너희들은 시집을 가서도 그렇게 노숙자처럼 싸울 것이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애초에 비정규직이란 사실을 알고 취직한 것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건을 보내기도 한다.
"비정규직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정규직의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 중 많은 이들도 비정규직이 뭔지도 모르고 취업했다. 철도공사는 처음 우리에게 준공무원 수준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우린 철저히 이용당했다. 철도공사의 비용절감을 왜 우리 여승무원들이 떠안아야 하는가.

이런 불합리한 것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철도청은 'KTX의 꽃'이라며 뽑아놓고 업무와 전혀 관련없는 철도유통에 우리를 위탁 관리했다. 그리고 이번엔 우리를 KTX관광레저로 넘겨 관리한다고 한다. 우리는 소모품이 절대 아니다. 사람들이 사용자의 시선으로만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다."

- 이철 사장은 철도공사가 KTX 여승무원을 직접 채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고 있는데.
"처음에 이철 사장에 대해서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젠 자신의 한때 빛나는 과거를 팔아서 출세한 무능력한 정치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실망과 분노의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이철 사장은 지금 투사를 대량으로 키우고 있다. 우린 더 이상 버릴 것도, 추락한 땅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끝까지 간다."

- ⓒ 2006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없음:

댓글 쓰기